본문 바로가기

책/리뷰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한수희

 

 

에세이가 몇 년 전부터 좋아졌다. 그것들을 읽다보면 아득아득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있는데, 그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다. 작가가 뭐가 그렇게 어려워, 그냥 살아. 라고 가볍게 어깨 위에 턱 하고 손 한번 올려주고 으쓱하는 느낌이랄까.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던 마음이 그만 풀려버린다. 글도 물론 좋지만 문장 자체의 맛도 부드럽고, 저자의 기질이 대부분 성실한 게 느껴져서 좋다. 그런 까닭으로 선호하는 에세이스트로 일본에 마스다 미리가 있다면, 한국엔 한수희가 있다.

 

<온전히 나답게>라는 보랏빛 책으로 처음 만난 저자 한수희는 글 하나로 내 마음을 몽땅 앗아가버렸다. 에세이는 비교적 다른 글보다 소재도 다양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적으면 되는 것이니 쉽게 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겪어도 이처럼은 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우울할 때 반짝 리스트>라는 책을 개정증보하여 나온 것이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다. 이왕이면 신간을 사고 싶은 마음에 참았는데, 아무래도 계속해서 눈에 밟혀서 읽기 시작했다.

 

 

표지도 표지지만, 한번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 끌리는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라는 제목, 그리고 그 곁에 붙은 '남들보다 더디더라도 이 세계를 걷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부제가 다분히 한수희답다. 직선으로 올곧게 향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방황하더라도 그게 뭐 문제겠는가라는 쿨한 메시지. 그녀는 이 책에서 담담할 것, 씩씩할 것, 우아할 것이라는 주제로, 각 장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읽었던 책과 보았던 영화를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마음만 앞섰던 시절 무턱대고 떠난 인도 여행, 그곳에서 만난 다섯 명의 남자, 차이고 매달리고 했던 씁쓸한 연애의 기억, 어른이 된 후의 소비들, 모두 똑같은 집이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집,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섹시한 할머니 등 이야기도 다양하다. 그런데 보통의 에세이들처럼 모든 것이 낭만적이거나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책 속의 사노 요코나 노라 애프런처럼 약간 삐딱하고, 유머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좋았던 건 그녀가 마음에 들어 했던 영화와 책들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내가 보고, 읽었던 것들이 등장해 아아, 그런 장면이 있었던가 싶기도 했고, 이 영화는 궁금하네, 하고 생각했다. 리스트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책의 뒷부분에 덧붙임이라는 제목으로 친절히 나와 있었다.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한 수였다.

이어 그녀가 사랑하는 에세이들에 관해 쓴 것도 있는데, '재밌고, 좋다'라는 말을 이렇게 다양한 변주로 쓸 수 있구나 싶어서 별 것 아닌데도 감탄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글 정말 잘 쓴다라는 느낌을 주는 작가가 드문데, 내게 한수희는 진짜 잘 쓰네, 하는 작가 중 하나다. 이 책 이후로 그녀의 여행에세이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또 다른 읽을거리가 생겨서 좋다. 앞으로도 성실하게 '책과 빵'에서 글을 써주시길.

 

 

덧) 이 책의 어느 리뷰어가 책표지의 종이를 지적했다. 이 책을 가방에 넣고 일주일 다닌 뒤로 실로 절감했다. 예쁘다고 좋아했던 회색빛 표지는 위아래, 옆 할 것 없이 닳아버렸다. 벌써 너덜너덜해진 책표지를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