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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왕과 서커스》 : 요네자와 호노부

《왕과 서커스》 : 요네자와 호노부



올초에는 본격적으로 장르문학을 읽어보자는 결심이 있었다(지금은 그때의 명분을 좀 잃어버리긴 했지만). 나름 장르문학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파면 팔수록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았고, '일미즐'이나 '하우미'도 뒤늦게 알아서 가입해보니 웬만한 미스터리는 줄줄 꿰고 있는 마니아들이 정말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어디 가서 장르물에 관해 찍소리도 못할 하수였고, 그곳을 눈팅하면서 내가 얼마나 작가 편식이 심한지 알게 되었다. 그때 새로운 작가들의 책도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골랐던 첫 책이 요네자와 호노부의 <왕과 서커스>였다.  



실은 <왕과 서커스>라는 확 감이 오지 않는 제목은 별로 끌리지 않았는데, <야경>, '고전부 시리즈'로 유명했던 요네자와 호노부이기에 일단 한번 읽어보자는 마음이 컸다. 더군다나 띠지에 '2년 연속 미스터리 3관왕 달성'이라는 요란한 홍보문구까지 있으니 기본은 해주겠지, 라는 믿음도 있었다. 처음 읽는 작품이면서 기대란 기대는 다 한 셈이었다. 산 지는 꽤 되었으나 '읽고 싶어서'라기보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고른 탓에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고, 에세이만 연달아 읽은 지금에야 간만에 미스터리 생각이 나서 읽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는데, 2001년 실제 일어난 네팔 왕실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었다(황태자가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을 죽인 사건)



<왕과 서커스>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프리랜서 기자인 다치아라이는 취재를 위해 카트만두로 떠나왔고, 도쿄 로지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데, 그곳에서 파계승 일본인 야쓰다, 인도 상인 수쿠마르, 미국 대학생 로버트 폭스웰을 만난다. 다치아라이는 가끔씩 마주치는 이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가운데 그녀에게 기념품을 팔려고 다가오는 순진하고, 수가 빠른 소년 사가르와도 친해진다.


한편 다치아라이에겐 고민이 하나 있는데, 프리랜서 기자로 첫 기사를 쓰기 위해 날아온 네팔에서 어떤 사진을 찍고, 어떤 기사를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때 네팔에서 황태자가 여덟 명의 왕족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녀는 특종을 위해 그 사건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마침 도쿄 로지의 여주인인 차메리는 그 사건 당일 왕실의 경비를 맡았던 라제스와르 준위를 그녀에게 소개시켜주는데, 준위는 취재를 거부하고, 설상가상 다음 날 등 뒤에 'INFORMER'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로, 싸늘한 시체로 공터에 나뒹군다. 졸지에 다치아라이는 용의자로 몰려 경찰서에 연행되지만 곧 무혐의로 풀려나고, 준위의 행적을 쫓으면서 범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사실 이 소설은 '범인찾기'보다 다치아라이가 어떤 기사를 쓸 것인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증거가 충분치 않은 희대의 특종을 낚을 것인지, 특종을 포기하고 기사의 정당성을 쫓을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뉴스'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게 되며, 후반부 클라이맥스 부분의 두 사람의 대화는 깊은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의 명성에 기대한 만큼 초반의 차분한, 나쁘게 말하면 무미건조한 전개에 살짝 의심을 했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엔 이 책이 어째서 미스터리 3관왕을 할 수 있었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범인을 알겠다, 하고 안심을 하고 있을 때 마지막에 날리는 어퍼컷이라니. 더군다나 내 취향대로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것 같은 미지의 '네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메마른 땅, 입안을 수시로 맴도는 흙먼지, 빈번한 단수, 맑은 눈동자의 아이들, 쓰레기더미가 쌓인 공터, 아름다운 히말라야, 상인들이 몰려드는 초크, 느린 인터넷…. 네팔을 여행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풍경이 그려졌다. 확실히 올해 읽은 것 중에선 최고의 미스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