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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작지만 확실한 행복》 - 무라카미 하루키

작지만 확실한 행복 - 무라카미 하루키



어느 순간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뜻의 욜로가 유행이었다. 사람들의 입에 그 단어가 줄기차게 오르내리다,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하더니 그 뒤를 이어 나온 것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따온 말이라고. 큰 돈이 들지 않고, 때로는 남들은 이해 못할 일이라도 자신의 행복을 확실하게 높여줄 만한 일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퇴근 후 마시는 맥주, 다이어리를 꾸밀 예쁜 스티커를 수집하는 일, 잠자기 전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 같은 것들. 


'소확행, 소확행' 하는 말들을 자주 듣다 보니, 그 시작이 된 오래된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1997년에 나온 초판이나, 2015년에 나온 양장 개정판 모두 표지가 너무 올드해서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읽고 싶은데, 읽기 싫은 아이러니). 그러다 마침 후배가 이 책을 먼저 읽었고, 빌려준다고 해서 읽게 되었다. 실물로 본 초판은 역시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난해한 표지였고, 원고 역시 문법이 아주 자유분방했다. 또, 내지 디자인이 한글프로그램으로 만든 듯 허접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것들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년에 접어드는 하루키의 발랄하고, 솔직한 사고와 문체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이름을 공개하고 대놓고 깐다거나, 원고료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 일을 하기 힘들다거나, 일부일처제를 지향하고 있어서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거나, 쌍둥이 자매와 연애를 꿈꾼다거나 하는 것들을 마구마구 털어놓는다. 이 글을 썼던 당시만 해도 하루키는 지금처럼 거장 느낌은 아니었던 듯한데, '이렇게 써도 문제가 없었던 걸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로 유쾌했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으나 이 책을 읽을 때는 킥킥 댔던 것도 같으니 실로 대단한 작가가 아닌가 싶기도. 


책의 제목이 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꼭지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소확행을 이렇게 밝힌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언더팬츠가 쌓여 있는 것과 면 냄새를 풍기는 하얀 러닝 셔츠를 입는 것. 소박한데, 어쩐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아서 공감. 또, 같은 꼭지는 아니지만 열차를 타다가 산사태 때문에 발이 묶인 상황에, 동네 서점에 들러 책을 몇 권 고르고, 달콤한 향이 나는 포도도 사와 맛있게 먹었다는 것도 썼는데, 그 상황이 생생히 그려져서 같이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많이 읽진 못하고, 하루에 세 꼭지 정도씩을 읽어 나갔는데 최근 내게는 이게 소확행이나 다름없었다. 또 다른 에세이도 읽고 싶은데, 표지의 장벽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