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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믿고 보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전히 건재했다. 물론,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 누구나 이견 없이 최고로 꼽는 <악의>,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대표작에 비하면 살짝 임팩트가 부족하다 느껴지지만. <기린의 날개>는 2011년 작으로, 일본에선 소설 출간 후 아베 히로시, 아라가키 유이 주연으로 영화로도 제작됐다(책이 낫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2017년 2월에 출간되었으니, 실은 출간이 조금 늦은 셈. 7년이나 늦은 출간이지만, 그래도 비교적 최근작에 속하는 편이라 트릭이 구식이라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표지도 고급스럽게 뽑아냈다. 개인적으로 일러스트로 스토리를 한눈에 파악하게 만든 것도 인상적이고, 남색 표지에 살구색 면지의 조합도 마음에 든다. 원서는 어땠나 싶어서 찾아봤는데, 우리나라 디자인이 훨씬 깔끔하고, 예뻤다.  


<기린의 날개>는 도쿄 한복판 니혼바시에서 건축회사에서 일하는 중년 남성이 칼에 찔린 채 쓰러진 것을 순경이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경찰이 주변 검문을 펼치는데, 수상한 남자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트럭에 치이는 일이 발생한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그의 소지품을 조사하던 중 경찰은 피해자의 물건을 발견하고, 그는 단숨에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의 신원을 파악하니 피해자와 같은 건축회사에서 일하던 일용직 근로자. 

경찰은 사건이 거의 해결됐다고 보고, 종결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몰고 간다. 그런 움직임과는 다르게, 가가 형사는 니혼바시 일대를 샅샅이 탐문하며 끈질기게 피해자의 행적을 좇고, 마침내 생전에 피해자가 신사를 돌면서 자신이 접은 종이학을 가져와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는 '피해자는 왜 신사를 돌았는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해야만 했는가?'에 주목하는데, 그 진실의 끝은 절절한 부성애다. 



히가시노 게이고만 믿고 일단 샀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야 주제가 '부성애'라는 걸 알았다. 김이 샜다.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를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과격한 스릴러를 읽고 싶었다. 그래도 읽어 보자 싶어서 읽었는데, 경찰의 수사 방식, 산재 문제, 언론 취재 같은 생각할 만한 이야기도 던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허를 찌르는 반전도 내놓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니혼바시 다리의 기린 상을 향해 걷는 아버지. 그 모습이 생생해 책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오래간다. 그 여운에 도쿄에 가면 저길 꼭 가봐야지, 싶을 정도였다. 영화에선 스토리만 대강 복붙 수준으로 끌어왔는데, 소설이 훨씬 촘촘하게 얽혀 있다. 인생작이라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