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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약속

몇 주 전 점심을 먹으며 직원들에게 ‘산’에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산이라고는 해도 동네 뒷산 같은 것). 평소 운동도 안 하고, 매번 뒹굴거리며 지내는 주말이 마음에 걸렸다. 또 봄인데 그 좋은 날씨를 그냥 버리는 것도 아까워서.

8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2명이 괜찮다고 했다. 나 포함 셋이니 너무 무리가 많지도 않고 적당히 걸을 만하겠다 싶었다. 들떠서 어느 동네의 산이 좋을지, 산을 갔다 온 뒤엔 어떤 맛집을 갈지 등등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꽤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흘러 산도, 그날의 점심 메뉴도 이것저것 대략적으로 정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미나토 가나에의 책 ‘여자들의 등산일기’까지 사버렸다!

 

몇 주 후 나는 푸껫으로 떠났다. 정말 온전히 쉬고 싶어서 관광지랄 것도 별로 없는 여행지로 고른 게 푸껫이었다. 분명 주변에 뭔가 더 있다면 나는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왕 왔는데 하나도 빼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또 열심히 돌아다녔을 게 뻔했다. 다행히 푸껫의 중심은 하루면 다 돌아볼 빠통 거리와 비치가 8할이었다. 나는 늦잠을 자고, 푹신한 리조트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 넷플릭스를 켜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도 하고, 룸서비스도 시키고, 밤엔 잠깐 비치로 나가 사람들을 구경하며 완벽하게 늘어졌다. 정말 원했던 완전한 휴식.

 

그렇게 일주일을 놀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산으로 가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며칠의 여유가 있을 땐 가야지, 하고 뭘 입을까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론 귀찮았다. 약속 날이 되기까지는 아직 며칠이 더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동안 같이 가기로 한 누구도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이런 상황 익숙하다). 그래서 일단 후배 1에겐 “K씨한테 다시 물어보고 간다고 하면 가죠, 아니면 다음에” 하고 넌지시 파투의 밑밥을 깔아두었다. 그리고 다가온 전날. K씨에게 어쩌겠느냐, 물었더니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그냥 다음에 가죠” 하고 말해버렸다. 그로써 몇 주간의 대화들은 몽땅 다 폐기처분.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는 의욕도, 분위기도 ‘확’ 달아오르는데, 며칠만 지나면 곧 흐지부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식어버리고 만다. 그러고 산을 가기로 했던 날엔 마찬가지로 집에서 늘어지게 잤을 뿐이고.

 

푸껫에서의 사진이나 재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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