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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연락처

 

내가 좋아하는 아우터 하나가 있다. 

 

봄, 가을 정도에만 입을 만한 옷인데, 때가 짧으니 몇 번 입지도 못한 채로 늘 계절이 바뀌곤 했다. 얼른 그 옷이 입고 싶어서 봄을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옷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몸을 아래로 굽히면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옷은 이쁘니까 괜찮았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옷을 입고 나갔다가 결국 휴대폰을 고장내고 말았다. 그 전날에도, 아침에도 신발을 신을 때면 두두둑 물건을 떨어뜨려서 조심해야지, 생각했었는데. 

 

물에 빠진 휴대폰은 끝내 켜지질 않았다. 하와이 신혼여행 사진이고, 아끼던 일상 사진들이고 전부 잃어버렸다. 아꼈던 사진을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쓰던 어플도, 지인들의 연락처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휴대폰이 대수냐, 하고 생각하면서 넘어가려 했으나 대수였다. 며칠을 끙끙 거리다 결국 갤럭시→아이폰으로 휴대폰을 바꾸기로 결정하면서 차츰 감정은 누그러졌다(사람은 사람으로 잊듯 휴대폰은 또 다른 휴대폰으로 잊는 법). 손에 익지도 않은 새 휴대폰을 들고 기억을 되살려 어플도 다운 받고, 기능도 익혀갔다. 

 

하지만 난관은 날아가버린 연락처. 그나마 카톡에 지인들이 등록되어 있어서 번호를 알려달라고 얘기하면 될 텐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 사람은 안 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이 사람이랑 연락할 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묻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겐 얼른 번호를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남겼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사람들이 다수였다. 휴대폰을 망가뜨리기 전에는 내 결혼식도 있었다. 이때도 청첩장을 보내도 되는 사이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연락처를 묻지도 못하고, 청첩장을 돌리지 못할 사이라면 이건 모르는 사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그리하여 앞으로는 연락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애매모호한 관계를 청산하고,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쏟고, 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또 빈 자리가 생겨야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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