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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라고 하면, 내게는 넘어야만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넘기는 힘든 그런 산 같았다. <상실의 시대>만 해도 그랬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라서 출판계에서 일하는데, 그 정도는 읽어야 되지 않겠나 하면서도, 매일 앞장만 뒤적이고 책장에 꽂아놓고, 다시 꺼내서 앞장만 뒤적이고를 반복했다(여전히 읽지 못했다). 이제껏 그의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이라곤 처녀작이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정도였다. 대학의 과제 중 하나로 그의 책을 읽는 거였는데, 짧단 이유로 선택했던 책이었다.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읽었던 하루키에게서 느낀 키워드는 '쿨한, 미국적인, 재즈풍, 맥주광'이었다. 크게 공감이 되지도, 문체가 유려한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 하루키에 대체 왜 열광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다 최근 다시 하루키에 도전해보려고, 그의 에세이인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기 시작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설이랑 다른 분위기라서 괜찮다는 평도 있길래, 그럼 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야 말로 하루키를 읽어내겠다며 꼼꼼하게 표지랑 목차를 읽어보았는데, 거기에 있던 글 중 하나가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습니다."

 

하루키는 꽤 엄격한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글을 몰아쓰는 스타일이 아니고, 매일 묵묵히 정해진 분량을 쓰고, 어떤 날씨이든 상관않고 달리기를 하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표지에 적혔던 저 글에서도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다는 말에서 본인이 얼마나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번 책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이른바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연재 에세이집 3권 중 2권에 해당한다. 이 무라카미 라디오 에세이집은 잡지 <앙앙>에 연재했던 걸 묶어서 낸 것인데, 2권은 1권 이후에 10년 뒤에 낸 것이란다. 사실 1권부터 사고 싶었는데 살 때 1권이 없어서 에세이니까 순서가 무슨 대수겠느냐, 싶어서 아쉬운 대로 샀다. 

이번 책에는 총 52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너무 진지하진 않으려나 하고 걱정했는데, 오히려 굉장히 가볍고, 산뜻한 느낌이다. 하루키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가볍게 읽을 수 있고, 하루키는 어떤 사람인지 그의 취향과 생각, 일상, 여행에 대해 은근하게 알려준다.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았을 때의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아내와 입맛이 다른 그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는 어떤지, 글을 쓸 땐 어떤 방식으로 써내려 가는지, 사람을 상대하는 자리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등등 말이다. 이렇게 사사로우면서도, 무작정 가볍기만 하진 않고, 글속에 그동안의 문학, 음악, 여행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게 상당히 느껴지고, 한편으론 유머러스함도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한 편의 에세이가 끝날 때 한줄평처럼 달린 그의 글이 좋았다.

 

 

이런 그가 자신의 에세이를 쓸 때 유념하는 게 있다는데, 그 3가지는 이렇다. 첫째, 타인의 험담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이 늘어날 수도) 둘째, 변명이나 자랑을 되도록 하지 않기(어디까지가 자랑인지 경계가 모호하기는 하나)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가능한 한 피하기(물론 나도 개인적 의견이 있지만)이다. 방법을 알아도 그처럼 쓰긴 쉽지 않겠지만.   

이번 에세이를 읽으면서 다른 의미로 흥미로웠던 건, 삽화가의 글을 통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일하는 게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삽화를 하니, '어째서 너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삽화가, 하루키가 <앙앙>에 재연재하기로 결정했을 때 상당히 고무적이었다는 편집장의 이야기로 보나 역시나 대작가구나 싶었다. 하긴, 우리나라만 해도 선인세로 16억이나 지불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번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내게 하루키에 대한 고정관념을 털어준 의미 있는 에세이였다. 조만간 <상실의 시대>를 다시 꺼내 독일로 향하는 보잉 747기를 넘어 열심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