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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책을 좋아하지만, 한국 문학은 잘 읽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게 문화사대주의자 같아서, 가끔씩 반성에 젖어 몇 권의 책을 고르곤 하지만 언제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일 뿐이었다(지금도). 그런 내게 희망, 아니 충격을 주었던 작가가 정이현이었다. 그녀의 책을 처음 읽은 건 대학 교양강의 때문이었는데, 그때 과제가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발제를 하는 것이었다. 학점을 위해서, 였다. 그 책을 읽었던 건. 그렇게 읽었던 책은 한국 문학의 단조로움, 감성에만 호소하는, 이라는 느낌과 전혀 달랐다. 젊은 여성작가의 글이어서 그런지 낡지 않고, 어렵지 않고, 발칙했다. 아,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후 <오늘의 거짓말>,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등 몇 권의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신간은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다. 서점에서 표지를 보아도, 책을 만져도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치만 몇 권의 책들에서 읽었던 문장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만났다. 세 번째 단편집이라고 했다. 9년 만에 나온. '정이현'이라는 이름이 반가워 사놓고 오래도록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펼치지 못했다.  

 

 

첫 단편은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라는 단편이었다. 시작은 심했다. 죽은 아버지의 전 여자친구와의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이야기인데(이성적 만남이 아니고), 주인공은 '이 세상에는 꽤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관계가 있는 법이더라고' 관계를 설명한다. 늘 친절했던 조 여사가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의 이야기가 특히 먹먹했다. 나머지 단편들도 하루 1-2편 정도로 끊어서 읽었는데,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적지 않은 즐거움과 충격을 선사했다. 내가 어째서 그녀를 좋아했었지? 라는 물음에 충분한 대답을 받은 듯했다. 무엇보다 각각의 단편에는 '스토리'가 있었고, 세태가 적당히, 아니 아주 밀접하게 드러나 있었고, 속물근성까지 낱낱이 포착되었다. 강단 있는 듯하면서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문장들이 넘쳤던 소설이었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서랍 속의 집'하고 '안나'.

 

"지난 5년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8시 반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짓을 반복해왔다. 야근이나 초과근무는 없으며 토요일과 일요일은 쉰다. 물론 야근수당이나 특근수당도 없으며 월급은 적다." -10p

"남우가 깨어난 애니를 품에 안고 감격을 만끽하는 동안 그가 과연 어떤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인지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속내를 아무에게도 드러낼 수 없다는 데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74p

"이자에 매달 갚아야 할 원금까지 합치니 금액이 엄청났다. 진이 받는 기본급 3분의 2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외벌이로는 불가능했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었다." - 186p

 

 

+덧, 나머지 단편 줄거리

아무것도 아닌 것 - 고등학생인 자식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 엄마의 시점인데, 반전이!

우리 안의 천사 - 연인이 있고, 어느 날 남자에게 이복 형이 찾아와 아버지를 함께 죽이자고 제안하는 이야기.

영영, 여름 -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늘 부유하는 것 같았던 그 인생에 유일한 친구가 생기는 이야기.

밤의 대관람차 - 국회위원의 애인이었던, 지금은 여교사인 주인공. 전 애인의 부고를 접하고, 그녀가 회상하는 과거와 현재의 일상.

서랍 속의 집 - 아이 하나를 둔 전형적인 하우스 푸어의 이야기.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겨우 내 집 마련을 했더니, 그곳은..

안나 - 라틴댄스 동호회에서 만났던 나와 안나. 몇 년 뒤 유치원 보조교사와 학부모로 만나게 되고 벌어지는 일.